믿음의 현장
메리 스크랜튼, 한국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 (2)
2023년 5월 14일
한국 감리교회를 빛낸 해외선교사(14)
권순정 목사(목회선교지원실)
메리 스크랜튼이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조선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을 때, 그녀의 나이는 53세였습니다. 윌리엄 스크랜튼은 미국북감리교회의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았고, 메리 스크랜튼은 미국 감리교여성해외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에서 파송을 받았는데, 사실 메리 스크랜튼이 선교사로 추천받았을 때 반대하는 여론도 많았습니다. 과부라는 것과 나이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메리 스크랜튼이 파송을 받고, 또 한국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목사의 딸로 태어나 평생을 교회에 헌신하며 살았고, 평소에도 선교에 매우 열정적이었으며, 또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조선 땅을 향할 결심을 했기 때문입니다.
메리 스크랜튼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에 조선에 들어왔지만, 이화학당을 비롯한 진명여학교, 수원 삼일소학당(매향여자 중·고등학교), 달성매일학교, 여성 간호사학교 등 여성교육과 의료교육을 위한 시설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메리 스크랜튼은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Koreans better Korean’s only)라는 교육이념을 갖고 한국 학생들을 서양의 문물에 무조건적으로 맞추기보다는 한국인과 여성으로서 긍지와 존엄성을 갖게 하는 교육을 했으며, 이화학당의 교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더욱 다양한 여학교를 설립하는데 조력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메리 스크랜튼은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 특별히 여성을 향한 사역에 집중했고, 의료선교를 통해 복음전도하는 것을 귀한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장로교의 첫 선교사인 알렌 박사(Dr. H. N. Allen)는 스크랜튼 목사가 광혜원이라는 정부병원에서 일하기보다는 독자적으로 가난한 곳을 찾아가 시병원을 세운 이유를 순수한 복음전도 사업을 하기 위한 것이라며 부러워했습니다. 이처럼 스크랜튼 모자의 시선은 항상 소외된 자들, 약한 자들, 그리고 복음전도를 향해 있었습니다.
메리 스크랜튼이 25년간 조선 땅에서 이룬 선교사역은 한국 근대화의 귀중한 씨앗이 되었으며, 그녀는 감리교회의 선교사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모든 기독교 여선교사들의 대모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9년 그녀가 임종했을 때, 상여를 따르는 무리가 8Km나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메리 스크랜튼의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