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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처 목사

한국감리교회를 빛낸 해외선교사 1

조선 선교의 아버지 가우처 목사
해외선교사 가우처 목사

1845년 6월 7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웨인스보로에서 태어난 가우처 목사(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는 14세 때 신앙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869년 미연합감리교회에 허입한 후, 1871년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22년간 목회하며 15개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미연합감리교회의 동양 선교의 개척자였고 인도, 중국, 일본 선교의 지원 및 후원에 앞장섰습니다. 그가 조선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조선 선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이듬해 푸트(L. H. Foote)가 미국의 초대 공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고종 황제는 이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는데, 인천항을 출발해서 일본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사절단이 미국의 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lan Arthur)와 면담하기 위해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하던 중 가우처 목사를 만났습니다. 이들에게 먼저 접근한 것은 가우처 목사였습니다. 그는 기이한 옷차림의 동양 사람들에게 통역관을 통해 어디서 왔는지 물으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우연한 만남이 미연합감리교회의 조선 선교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가우처 목사는 사절단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조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고 두 달 후 선교사 파송을 위한 헌금을 했습니다.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이듬해 푸트(L. H. Foote)가 미국의 초대 공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고종 황제는 이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는데, 인천항을 출발해서 일본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사절단이 미국의 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lan Arthur)와 면담하기 위해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하던 중 가우처 목사를 만났습니다. 이들에게 먼저 접근한 것은 가우처 목사였습니다. 그는 기이한 옷차림의 동양 사람들에게 통역관을 통해 어디서 왔는지 물으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우연한 만남이 미연합감리교회의 조선 선교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가우처 목사는 사절단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조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고 두 달 후 선교사 파송을 위한 헌금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선교는 정세의 불안으로 인해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팽배했습니다. 가우처는 일본에 있던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선교사가 조선을 방문할 수 있도록 독려하며 여행경비를 후원하였고, 1884년 6월 24일 조선을 방문한 매클레이 선교사가 고종 황제에게 의료와 교육 분야에 한해서 선교를 허락한다는 윤허를 받아내고 정동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조선 선교는 매클레이 선교사가 적극적인 선교를 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가우처 목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가우처 목사는 계속해서 선교 기금을 헌금했고 미연합감리교회는 첫 번째 조선 선교사로 스크랜턴 대부인,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 그리고 교육 선교사로 헨리 아펜젤러를 파송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조선에서 선교할 수 있도록 후원금을 모금해주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가우처 목사는 1907년부터 1920년까지 6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으며,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대학을 후원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이나 유학자금을 마련해주기도 하였습니다. 1920년 늦가을 조선을 다녀간 후,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1922년 77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열차 안에서의 사절단과 가우처 목사의 우연한 만남,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자 계획이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나 스크랜턴 선교사, 그 외에 많은 선교사들이 일할 수 있도록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줬던 가우처 목사, 그러기에 그를 조선 선교의 아버지라 기억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