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독립운동 앞장선 기독인들”

2019.02.09광림교회

3.1 운동과 기독교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1919년 3월 1일 전후에 해외와 전국에서 일어난 폭발적 항일 투쟁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 3.1운동은 당시 전 국민의 1.5%밖에 되지 않았던 기독교의 주도와 참여로 이뤄졌으며, 임시정부 설립과 민주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부당하게 병탄 된 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1년 이후 조선총독부는 무단통치를 통해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말살하고, 경제적으로 침탈하며, 가혹한 탄압정치를 했다. 더 나아가 일제는 교회를 조직적으로 억압했다. 1915년에 발표된 포교규칙에 의하면 모든 성직자는 총독부로부터 자격증을 받아야 하며, 집회허가를 받아야 했다. 경찰은 모든 예배를 감시하며 설교의 내용을 검열하였다. 일제의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이에 저항하는 민족의 내부적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은 이 나라 민족 전체가 참여한 민족운동이다. 남녀노소의 구별도, 학력, 신앙, 계급, 지역의 구별도 없었다. 그런데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전 민족이 참여하는 대중 운동으로 발전하기까지는 기독교, 특히 감리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학자들은 이야기하기를 3.1운동이 전국적인 대중 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던 교회와 교단의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며,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자유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의 민족관이나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교육 등, 교회 교육의 영향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덕주 교수는 당시 기독교는 전체 인구의 1.5% 수준에 머무는 소수종교였지만, 3.1운동의 준비, 모의단계로부터 대중 투쟁 단계, 그리고 3.1운동 후 임시정부 조직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기독교계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교회가 선교 초기부터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으며, 교회가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기독교의 초교파 연합운동이 종교와 신분을 초월한 항일민족운동으로 연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 달간 3.1운동에 영향을 미친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김마리아(1892.6.18.~1944.3.13.)

3.1운동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2.8 독립선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18년 1월 8일 1차 대전에 대한 전후 처리 지침으로써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 그러자 민족지도자들과 해외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이었다. 김마리아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정신여학교의 수학교사였다. 선생의 재능과 조국에 대한 열정에 감동한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재정 지원으로 재직 중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선생은 독립운동에 관심을 두고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 참가하여 연행되었다. 선생은 국내의 독립운동은 전 여성들이 참여하지 않고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옷 속에 감추고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교육계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2.8독립선언에 대한 소개를 하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도왔으나 조직원의 배신으로 투옥되었다. 일제의 고문과 악형을 당해 병보석으로 출소한 뒤 배편으로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 그러나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서로의 이념과 가치에 따라 서로 분열을 거듭했다. 이에 선생은 미국으로 떠나 사회학과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928년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였다. 1933년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으로 서울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 부임하여 신학을 강의하였다. 이때에도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하여 치료를 받다가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둔 1944년 3월 13일 순국하고 말았다.

 

  1. 이승훈(1864.3.25.~1930.5.9.)

이승훈 선생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놋그릇 가게의 노동자가 되었다. 훗날 그는 뛰어난 사업가가 되었고, 공장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지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민족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으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그를 만난 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되었으며 서적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태극서관이라고 하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이어 민족운동의 요람이 된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이자 장로로 독실한 신앙을 갖고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일본의 경계를 사게 되었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계열,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였다. 사실 3.1운동이 있기 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이승훈 선생의 주도로 계획 중이었다. 그러나 종교를 초월하여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에 따라 다른 종교와도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3.1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선생은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약속받고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독립선언식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히어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었고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은 1922년 7월 22일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며 교육운동에 앞장서다 1930년 5월 8일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