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림의 강단
예수의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
2024년 9월 8일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세 가지 용어, ‘부르심을 받은 자’, ‘거룩한 사람들’, ‘사랑받는 자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 단어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자 그리스도인이 입은 옷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 가운데 구체적인 윤리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골로새서 3:12~17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광림교회 담임목사 김 정 석
kwanglim-sp@hanmail.net
첫째, 긍휼함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이 여기셔서 구원하여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향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시고 착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시는 것과 같이 온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잘하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직적인 사랑이요, 하향의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긍휼과 자비는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둘째,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기독교 윤리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 겸손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하여 죄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바울이 죄인 중에 죄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였까요? 바울의 이 말은 자신이 그만큼 교만한 자였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리고 이로 인해 거룩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정체성이 분명하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함은 그리스도인에게 없어서는 안되며, 놓쳐서도 안되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또한 겸손할 때에 온유함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제목은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는 인도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한 평생 인도에서 고생하며 선교하신 분입니다. 그는 자신을 ‘벌레 같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후에 무덤의 비석에 쓰일 비문을 적어 놓았고, 그가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이 그대로 써넣었다고 합니다. “윌리엄 캐리 1761년생 죄많고 약하고 능력 없는 벌레인 나는 당신의 긍휼하신 거룩한 손에 기대어 살다 여기에 잠들었다.” 진정 그가 벌레 같은 자였을까요? 아닙니다. 윌리엄 캐리는 자신을 계속해서 낮추고, 또 낮추며 살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인도 선교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떠한 일에도 불만이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며 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감사할 수 있으며, 시험을 이길 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오래 참으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참되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오래’라는 단어는 시간적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리한 일에도 참는 것이요, 억울한 일에도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이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갚으시고 회복시켜 주심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우리 예수님은 모진 고통의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래 참는다는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베드로와 같은 사람에게도 우리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당신을 배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참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고귀한 성품의 사람, 고귀한 내적 성품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한다면 자신은 성화된 삶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데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부르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사람으로 세워시며, 우리 안에 긍휼과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의 성품을 주신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자,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은 자가 갖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은 무엇입니까?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용납하고 피차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납할 때, 나의 인격과 성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가치의 기준을 옳고 그름에 두고, 그것으로 일의 가치를 삼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은 가치의 기준을 ‘나의 일이 예수님을 위한 일인가?’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일을 결정할 때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긍휼함과 겸손함 그리고 자비와 오래 참음의 내적인 옷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서로 피차 용납하고, 무엇을 하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요, 하나님 나라의 사신으로 이 땅에 평화를 심어가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