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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와 감리교회

웨슬리의 발자취를 따라

존 웨슬리의 탄생 1

존 웨슬리의 탄생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중동부에 있는 링컨셔(Linconshire)의 엡워스(Epworth)에서 영국 성공회의 사제인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비국교도 목사의 딸인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 사이에서 19명의 자녀 중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19명의 형제자매가 태어났으나 불행하게도 그 중에서 9명의 형제자매는 어릴 때 사망하고 10명(형제 3, 자매 7)만 생존하였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 교구 성직자로 청빈한 삶을 살며 언제나 나눔과 섬김의 목회를 하였고,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는 당대 대표적인 청교도 목사의 딸로 원칙과 규칙을 중 요시하며 청교도적 신앙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는 경건과 지식, 철저한 청교도 신앙, 성경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자녀들을 교육했으며, 자녀들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살도록 규칙을 정했다.
이러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존 웨슬리는 정신적 위기와 신학적 의문에 빠졌을 때 편지를 통해 부모님과 대화하며 문제를 해결하곤 하였다.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은 이미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었다.

  • 사무엘 웨슬리

    사무엘 웨슬리

  • 수산나 웨슬리

    수산나 웨슬리

존 웨슬리의 어린시절

존 웨슬리가 6세가 되던 해, 곧 1709년 2월 9일 목요일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에 폭도들이 목사관을 방화하였다. 모든 가족이 대피하였으나 존 웨슬리는 불길과 연기에 휩싸였다. 사람들이 사다리를 가져오자고 했으나, 그럴 시간이 없어 한 사람이 벽에 바싹 붙어 서고 다른 사람 이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서 웨슬리를 구출하였고 그가 구출되자마자 집이 무너졌다. 

웨슬리는 훗날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자신을 “불꽃 속에서 타다 남은 부지깽이(Brand plucked from the burning)” 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런 화재 속에서 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강한 소명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주민들은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이들에게 감명을 받고, 그 이후로 더 이상 웨슬리 가족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웨슬리는 이런 소년 시절의 박해를 통해서 링컨셔 농민들의 무지와 거칠음, 그리고 아버지가 폭도를 어떻게 상대했는지, 또 자신이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 경험을 인지하였다. 이런 인지는 웨슬리가 나중에 폭도를 상대하게 되었을 때 도움이 되었다.

  • 엡워스 목사관 올드 렉토리 화재에서 구출받는 존 웨슬리

    엡워스 목사관 올드 렉토리 화재에서 구출받는 존 웨슬리

  • 엡워스 목사관에서 타고 남은 나무

    엡워스 목사관에서 타고 남은 나무

  • 엡워스 목사관 정면

    엡워스 목사관 정면

  • 엡워스 목사관 측면

    엡워스 목사관 측면

존 웨슬리의 학창시절
차터하우스 Charter House School

존 웨슬리는 1714년 1월 28일 10세가 되던 해, 버킹엄(Buckingham) 공작의 추천으로 런던의 명문 차터하우스(Charter House School)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정규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웨슬리는 그곳에서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한 태도를 인정받았으며 라틴어 시와 문학공부를 즐겼다. 또한 이때 종교적 심성과 지적 능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옥스퍼드 대학 University of Oxford

존 웨슬리는 1720년 6월 차터하우스를 졸업하고 그의 영적 고향이 된 옥스퍼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의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웨슬리는 논리적 재능과 문학에 소질을 보이며 1724년 B.A.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725년, 웨슬리는 성직자가 되는 것이 맞는 것인가 갈등하게 된다. 그가 느끼기에 가슴 속에는 아직 하나님의 불꽃이 희미하고 영적 경험을 사모하는 마음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일하던 노동자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입을 것, 먹을 것, 잘 곳이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노동자의 고백에 감명을 받고 사제가 되기로 다짐하게 된다.

신성 클럽 Holy Club

1725년 9월 19일 집사사제의 안수를 받은 존 웨슬리는 아버지의 목회 업무와 연구를 돕다가 1726 년 3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Lincoln College)의 연구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1729년 11월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다니고 있던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이라는 모임을 시작하였 다. 이 모임은 성경연구, 묵상, 기도와 예배 등을 훈련하였다. 클럽 회원들이 매일 규칙적으로 이러 한 일들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규칙쟁이(Methodist)’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이 오늘날 감리교회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 1715년 차터하우스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

    링컨 칼리지 과거

  • 신성클럽의 모임

    링컨 칼리지의 웨슬리상

  • 링컨 칼리지 과거

    1715년 차터하우스

  • 링컨 칼리지의 웨슬리상

    신성클럽의 모임

  • 찰스 웨슬리

    찰스 웨슬리

조지아 주에서의 선교와 실패

1735년 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존 웨슬리는 1735년 10월 21일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재단이 승인한 목사로 시몬즈(Simmonds) 호를 타고 조지아주로 떠났다. 시몬즈 호에는 19명의 선원과 80여 명의 영국인 그리고 26명의 모라비안 교도들이 함께 승선하였다. 조지아 주로 향하던 시몬즈 호는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모두가 두려움에 빠져 있었을 때 모라비안 교도들이 찬양을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에 웨슬리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긴 항해의 끝에 1736년 2월 6일 사바나 (Savannah) 항에 근접해 있는 티비(Tybee) 섬에 도착하였다. 조지아 주에서 웨슬리는 이민 개척자들의 지도자인 스팡겐베르크(August G. Spangenberg, 1704~1792)와의 대화를 통하여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회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당신의 마음속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성령이 증거한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이런 종류의 질문들이 웨슬리의 마음속에 거룩한 섬광을 번쩍이게 했다.
존 웨슬리는 몇 번이고 이교도 선교를 실시하려 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1736년 6월 30일, 웨슬리는 인디언 지역의 초크타우(Choctaw)족을 선교하려고 계획하였다. 하지만 사바나에 목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계획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웨슬리의 선교 대상은 인디언만이 아니라 흑인과 유대인들까지도 포함되었다. 조지아주에서 웨슬리는 열심히 선교 사역에 전념했으나 극단의 교회주의와 금욕주의에 일관한 나머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웨슬리의 고귀한 생활과 높은 교양이 거친 식민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또한 웨슬리의 목적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으나 실제로 조지아에 와보니 성공회의 사제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 시몬즈 호에서 폭풍을 만난 웨슬리 형제와 침착한 모라비안 교도들

    시몬즈 호에서 폭풍을 만난 웨슬리 형제와 침착한 모라비안 교도들

  • 사바나 항에 도착하는 존과 찰 웨슬리

    사바나 항에 도착하는 존과 찰스 웨슬리

  • 인디언에게 전도하는 존 웨슬리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전도하는 존 웨슬리

  • 사바나 도착 기념비

    사바나 도착 기념비

존 웨슬리의 회심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의 회심

1738년 2월 영국으로 돌아온 존 웨슬리는 약 1년 11개월 동안 조지아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심하지 못한 자신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오자 좌절과 절망에 놓이게 되었고 이런 쓰라린 경험은 그의 신학에 조명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아직 죄악 가운데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이며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웨슬리는 피터 뵐러(Peter Bohler)를 만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음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배우게 되었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적 기초가 무너진 어느 날, 웨슬리는 “믿음이 없어도 믿음을 얻을 때까지, 그리고 믿음을 얻은 후에도 믿음을 전하라” 는 뵐러의 충고를 듣고 사형수를 찾아가 전도를 하니 실제로 그가 회심을 하고 침착함과 평안한 마음으로 형장으로 갔다.
그리고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오후에 세인트 폴(St. Paul) 대성당 예배에 참석하고 저녁 8시 45분에 울적한 마음으로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 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작은 집회에 참석하였 는데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웨슬리는 이 말씀을 듣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리스도만이 구주가 되며 자신의 죄가 씻기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전과 달리 회심 경험을 토대로 설교를 시작하였고 이 복음주의 운동의 시작이 감리교운동(Methodism)을 탄생하게 하였다.

존 웨슬리를 변화시킨 루터의 로마서 서문

“믿음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탄생시킨다. 옛 아담을 죽게 하고 우리를 마음과 성품과 정신, 그리고 모든 힘으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변화시킴과 동시에 성령으로 힘 입혀 주신다. 아! 신앙은 생동적이며 창조적이며 활동적이며 강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선한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선한 일을 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을 묻기 이전에 이미 선한 일이 행하여져 있으며 또한 언제나 행하게 된다.”

  • 올더스게이트 거리 지도

    올더스게이트 거리 지도

  • 세인트 폴(St. Paul) 성당

    세인트 폴(St. Paul) 대성당

    세인트 폴 성당의 웨슬리 동상

    세인트 폴 대성당의 웨슬리 동상

  • 존 웨슬리 회심 동판

    존 웨슬리 회심 동판

    엡워스 웨슬리 기념교회의 존과 찰스 웨슬리 스테인드글라스

    엡워스 웨슬리 기념교회의 존과 찰스 웨슬리 스테인드글라스

  • 존 웨슬리의 회심 기념비

    존 웨슬리의 회심 기념비(런던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