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림의 강단
생명의 주인과 함께 걸어가라
2025년 2월 9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눅 7:14)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생명일 것입니다. 생명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생명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도 생명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그렇기에 예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생명을 살리는 기사가 세 번 나옵니다.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사건과 예수님의 친구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그리고 오늘 본문인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유한성과 더불어 한계를 넘어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사람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죽은 자를 마치 병자를 고치시듯이 “청년이여 일어나라”고 외치시니 죽었던 청년이 관을 열고 나온 사건, 즉 예수님께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시며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 사건입니다.
인생의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보면 참으로 힘겨운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주저 앉고 싶을 정도의 힘이 든 인생의 여정,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큰 도전과 용기를 주십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몇 가지로 나누어 함께 영적인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7:11~17
11.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감독회장 김 정 석
kwanglim-sp@hanmail.net
첫째, 생명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 그러기에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기적을 보기 위하여 그 뒤를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이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나인 성문 앞에 다다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기적을 보기 위함이지만 분명한 것은 기쁨과 생명의 행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문 안 쪽에서는 하나의 슬픔의 행렬이 나오려고 합니다. 다름 아닌 나인성에 살고 있는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마주한 두 행렬, 하나는 생명의 행렬이요 기쁨의 행렬이지만 다른 하나는 죽음의 행렬이요 절망의 행렬입니다. 이 두 행렬의 만남, 결과는 기쁨이 슬픔을 삼켜버렸습니다. 절망이 사라지고 소망이 남았습니다. 어두움과 빛이 만나면서 빛만 남았습니다.
예수 만남의 역사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기만 하면 우리 안에 어두움과 슬픔은 물러가고 새로운 기쁨과 소망이 넘쳐납니다. 절망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여기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만남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의 어두운 것들을 생각하며 한탄과 비판하며 살았던 우리의 인생과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들을 생각하며 절망하고 좌절하던 우리의 삶일지라도 주님을 만나는 순간 내 안에 기쁨이 넘치고 삶의 용기가 납니다. 이 만남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어두움의 그림자와 슬픔의 마음을 몰아내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넘쳐나게 합니다.
올 한 해에는 생명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붙잡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가겠노라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결단이 있게 될 때 어두움이 변하여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새롭게 인도하시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될 줄 믿습니다.
둘째, 우리의 형편을 돌아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단순히 죽은 자를 살리신 것으로만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더 깊게 묵상하다 보면 한 가지의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육신의 질병이나 참된 생명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던 사람들,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문제를 고하고, 고쳐주기를 간청하지만 나인성 과부는 예수님께 아무런 요청이나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나인성 과부조차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아무런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부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이미 죽어 장사 지내러 장지로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라도 이러한 인간의 한계 상황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부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온전치 못한 믿음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온전하지 못한 믿음의 불완전한 모습, 이적과 표적만을 바라는 얄팍한 믿음의 모습, 이러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마다하지 않으시고 다가오셔서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 절망과 어두움을 아시는 예수님, 그냥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같이 아파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단순히 안타깝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과부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슴이 뛰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말하면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같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긍휼하심이 있으면 오늘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셋째, 권세자가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유대의 장례 풍습과 우리나라의 장례 풍습은 비슷합니다. 망자가 가는 길은 그 길을 가고 있던 사람도 일부러 그 길을 비켜줍니다. 그 누구도 막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행렬을 막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까이 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자 상여가 멈춥니다. 이어서 아무런 대화 없이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나님의 창조적 사건에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하실 때 창조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산 자에게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죽은 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능력과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이 곧 능력과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슬픔과 아픔의 해결자요, 위로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권세자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높이고 찬양할 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행하실 일들을 기도하십시오. 삶 가운데 주의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생명의 주인 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모든 것의 권세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복된 인생이 되기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