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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림의강단

구원의 복된 걸음을 걸으라

2020년 5월 10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누가복음 19장 9절)

본문의 말씀의 주인공은 ‘삭개오’입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회에서 세리는 백성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로마에 일정 부분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취하였습니다. 또한, 필요에 따라 당시의

로마 군인이나 권력자들의 돈줄 역할을 하면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정치적 대세를 잘 이용함으로써 쉽게 권력과 부를 취하고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이런 세리의 장이기까지 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는 높은 지위, 권력, 부를 모두 누렸던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반민족주의자라는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로마의 착취와 억압 가운데 있는데 이를 이용해서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삭개오는 마음속에서 깊은 갈등을 겪었으며,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사는 것만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로마의 앞잡이인가’라는 혼란 속에 정체성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각종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며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나사렛 출신의 한 청년, 그에게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이 있으며, 세리(마태)를 제자로 부르기까지 합니다. 과연 그가 누구길래? 삭개오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작은 키로 인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야 하는 체면 구기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구원을 얻었고, 새롭게 변화되는 인생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삭개오가 경험한 구원을 통한 변화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 구원의 복된 걸음을 걸어가는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시온 챌린지 아이들 만나길 바라는 예수님 마음 담아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광림교회 담임목사 김 정 석
    kwanglim-sp@hanmail.net
첫째, 존재(신분)의 변화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5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시고 개인적으로 다가와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자신을 필요로 하며, 기대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집에 머물러 이야기하시며, 구원을 베푸십니다.

유대 사람들은 상종하지도 않고 비난하였던 세리의 집에서 머문다는 것 자체는 당시 무척 파격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삭개오가 세리라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비난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집으로 맞이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구원은 신분의 변화 곧 존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삭개오에게 세리라는 세속적인 신분은 더 이상 무의미하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영적인 신분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절망, 불안, 염려, 갈등 가운데 빠져있는 인생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으로써, 그의 인생과 존재를 새롭게 하십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복된 걸음을 걸어가게 됩니다.

둘째,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인간의 실존,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죄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죄의 문제를 지적하며, 죄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죄는 결국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롬 6:23). 삭개오가 마주한 문제는 사회, 경제,정치적인 갈등, 고민, 불안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우리를 불행하고 두렵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문제들 또한 온전하게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존재의 변화와 더불어 죄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 역시 삭개오와 같이 다양하고 많은 문제들을 앞에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은혜를 통해 죄로부터의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우선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를 비롯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 안에 있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구원의 복된 걸음을 걷게 됩니다.

셋째, 삶의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절). 몸부림치면서 세상의 것들을 향해 달려왔던 인생, 그러나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만족과 기쁨에 머물렀던 삭개오에게 이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비로소 참 기쁨이 얻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참된 기쁨은 삭개오의 삶을 혁명적인 변화로 이끌어갑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절)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번 돈입니까? 많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비난을 받고 깊은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번 돈입니다. 더욱이 부자들에게는 ‘조금만 더’라는 한없는 욕심과 욕망의 심리가 작용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소유의 절반을 주겠다는 것만큼 혁명적인 변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기서 구원의 세 번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는 나아가서 삶의 변화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위적이거나 기계적인 변화가 아닌 자발적인 변화입니다. 나 중심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을 돌보는 삶으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라고 말하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구원 받은 자의 복된 걸음은 세상적으로 추구하던 것, 자신의 탐욕을 내려놓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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