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현장
선한 사마리아인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 - 1
2022년 10월 30일
한국감리교회를 빛낸 해외선교사(10)
권순정 목사(목회선교지원실)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은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조선에 파송되는 첫 번째 선교사로 인준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머니 메리 플레처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복음전도를 통해 전심을 다해 조선 백성의 친구가 되어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의사이자 목사로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일본을 거쳐 조선 땅에 들어왔는데, 사실 서울에 먼저 들어와 선교의 기틀을 닦은 것은 스크랜턴입니다. 아펜젤러 부부가 갑신정변의 여파로 서울에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스크랜턴이 먼저 서울에 도착해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의사로 활동한 것입니다.
그는 1885년 9월 10일부터 정동에 새로 마련한 집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하였고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 문턱이 낮은 병원으로 명성이 높아져 갔습니다. 1886년 6월 15일 정동에 새 병원 건물을 마련하기까지 522명의 환자를 진료하였고 1887년 조선 정부는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공인했습니다.
또한, 스크랜턴은 아펜젤러가 서울에 정착할 수 있도록 주택을 준비하고, 의료선교사이자 목사로서 아펜젤러를 도와 복음 전도에 힘을 썼습니다.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등을 설립하였고, 전덕기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길러내기도 했습니다.
성장 배경과 선교사가 되기까지
윌리엄 스크랜턴은 1856년 미국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은 감리교회 목사 집안의 딸로 신앙심이 매우 깊었는데, 윌리엄 스크랜턴이 열여섯이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하였습니다. 41세의 나이부터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도 교회 봉사와 선교활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윌리엄은 잘 성장하여 예일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뉴욕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선교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이 가정에 일본에 있던 매클레이 선교사로부터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고, 처음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으나 윌리엄 스크랜턴이 장티푸스에 걸려 투병하는 동안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를 간호하던 어머니 스크랜턴의 역할이 컸고, 또 그의 아내 롤리 암즈 부인이 남편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최초의 선교사로 인준되어 목사안수를 받고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두 살 된 딸과 함께 1885년 2월 3일 조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선교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병상에서의 치유의 경험과 가족들의 격려와 헌신으로 조선에서의 귀한 선교의 첫 삽을 떴을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개척 선교사로서 초기 한국 선교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