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현장
한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 선교사 - 3
2024년 4월 28일
한국감리교회를 빛낸 해외선교사 (21)
권순정 목사(목회선교지원실)
교육자이자 언어학자, 그리고 언론인, 한글학자로 활동했던 헐버트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졌습니다. 1800년대 말에 이르러 시작된 일제의 침탈 행위를 목격한 헐버트는 조선의 국내외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불법 및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고종 황제로부터 특사로 임명을 받아 미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고종의 친서를 들고 백악관을 향했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도움을 주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포기하지 않고 1907년 5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세 명의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비밀리에 파견하는 일에 크게 일조했습니다. 그는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를 피해 사전 작업을 하는데 공헌했으며, 이로 인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눈치 챈 일본의 방해로 인해 헤이그 특사는 실패로 끝났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이후 헐버트는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 미주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하면서 힘을 보탰고,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1908년에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전역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습니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했고, 1944년에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의 친일 정책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나라는 독립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다음해인 1949년 7월, 헐버트는 40년 만에 방한하여서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고자 했지만, 방한한지 1주일 만에 청량리 위생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생전에 “내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던 뜻을 받들어 그는 8월 11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