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림의 강단
너의 조성자가 말씀하느니라
2024년 10월 27일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좋은 소식’이란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이 단어는 고대 전쟁 가운데 전쟁의 상황과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 곧 전령이 마을에 도착하여 높은 망루나 성문에 올라가 구체적인 전투 상황과 승리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승리의 소식이자 해방의 소식이며 더불어 감격의 소식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과 사탄의 세력을 이겨 승리했다는 것, 곧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되며, 진노의 자녀이자 어두움의 자녀였던 존재가 빛의 자녀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기독교이기에 기독교를 가리켜서 ‘축제의 종교’요, ‘환희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참된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복음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셋째, 복음을 전하는 자의 인격입니다. 구원의 증거로서 바른 인격과 더불어 성숙한 인격, 곧 내면적 인격의 성숙함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요소가 합쳐질 때, 비로소 참된 복음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며, 온 인류를 제자로 삼는 복음의 증거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고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걸음이 복된 자의 걸음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걸음은 무엇일까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로마서 10:11~15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광림교회 담임목사 김 정 석
kwanglim-sp@hanmail.net
첫째, 복된 소식이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로마서 10장 9절 말씀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나를 위해 이루어졌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더불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먼저 나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내 안에 구원받은 감격이 넘쳐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의 감격과 기쁨이 내 안에 넘쳐나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거리의 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나 관습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지 모르지만 마리아는 이로 인해 새로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끝까지 지켰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 처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새로워지고 변화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증거할 복음의 내용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의 죄된 속성이 사라졌습니다. 때로는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길로 갔다 할지라도 회개하여 돌이켜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며 매일매일 새로워집니다. 이 감격이 있을 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걸음이 복된 걸음입니다.
둘째,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있다면 그것은 온 인류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요, 이 땅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다면 바울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15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희생할 동기 즉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희생할 정도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요, 희생을 통한 사명 즉 사람들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졌던 열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에 큰 환난과 핍박이 찾아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순교하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로마가 황제숭배 사상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자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시리아로 가기도 하고, 다른 나라들로 핍박을 피하여 난민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들은 흩어진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환경과 여건은 난민과 같이 되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누리는 기쁨과 감격을 다른 사람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주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 그러기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메는 목자의 심정,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복된 걸음의 주인공이 될 줄 믿습니다.
셋째, 은혜 안에 거하는 자의 걸음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은 내 의로움과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다는 진리를 깨닫게 될 때 복된 걸음의 주인공이 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 곧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은혜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깊은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기쁨과 감격이 나의 안에 채워집니다. 그러나 풍성하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모르기 때문에 우리 안에 감격과 기쁨이 사라진 것입니다. 기쁨과 감격이 있을 때 만족함이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내적 변화 곧 성품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이와 같은 내적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외적인 모습도 달라지게 됩니다. 얼굴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며 미소가 넘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 된 인생입니다.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때 기쁨과 감격을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있습니까?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갈증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생수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 우리 인생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신 예수님,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신 예수님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이 놀라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복된 걸음이 되어 우리 안에 넘치는 주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금 경험하는 복된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